인수대비는 배운 적 없는 것을 가르쳤다 — 《내훈》을 쓴 사람의 빈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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받은 적 없는 것을 물려준 사람 조선 여성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정한 책이 있습니다. 《내훈(內訓)》입니다. 3권 4책으로, 언행과 효친과 혼례를 다루고, 부부를 다루고, 어머니 노릇과 화목과 검약을 다룹니다. 조선 내내 양반가 여성 교육의 기본서였습니다. 그 책을 쓴 사람의 명식에는 배움의 자리가 없습니다. 이 사주에는 한 가지 핵심 모순이 있습니다 명리에서 나를 가르치고 길러주는 기운을 인성(印星) 이라고 부릅니다. 어머니, 스승, 배움, 문서, 그리고 나를 보호하는 것 전부가 이 자리에 들어갑니다. 인수대비의 여덟 글자에서 이 자리는 0개 입니다. 받은 것이 없는 사람이, 무엇을 어떻게 받아야 하는지를 적은 책을 남겼습니다. 채워진 사람이 나눈 것이 아니라, 비어 있던 사람이 물려준 것입니다.

세종대왕 사주에는 금(金)이 하나도 없었다 — 임금이 되고도 장인을 잃은 이유

밤 강물을 내려다보는 조선 임금의 뒷모습 — 세종대왕 사주의 임수(壬水) 일간을 그린 대표 이미지
금(金)이 하나도 없는 사주로 조선을 만든 임금
신선의 말씀
짐이 오늘 그대에게 한 사람의 명(命)을 펼쳐 보이려 한다.
조선의 네 번째 임금, 백성의 말을 글로 만든 이의 사주니라.

이 사주에는 한 가지 핵심 모순이 있습니다

세종대왕(이도, 1397~1450)은 조선에서 가장 많은 것을 만들어 낸 임금입니다. 훈민정음, 자격루, 앙부일구, 측우기, 칠정산. 그런데 그의 사주를 열어 보면 이상한 장면이 나옵니다.

자기를 도와줄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일간은 임수(壬水), 큰 강물에 비유되는 양(陽)의 물입니다. 오행 분포는 목1·화2·토2·금0·수1. 임수에게 금(金)은 나를 낳고 길러주는 인성(印星)인데 그게 0이고, 같은 편이 되어줄 비겁(比劫)도 0입니다. 명리에서 말하는 전형적인 신약(身弱) 구조입니다.

그리고 더 서늘한 대목이 있습니다. 그가 가장 많은 일을 해낸 10년이, 몸이 가장 빠르게 무너진 10년과 정확히 겹칩니다. 공법 여론조사와 자격루와 앙부일구가 쏟아진 바로 그 시기에,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또 소갈증을 앓은 지 이미 13~14년이다.
又患消渴已十三四年矣
— 《세종실록 85권, 세종 21년 6월 21일》

없는 것으로 만들어 내고, 만들어 내면서 무너진 사람. 세종대왕의 명식은 그렇게 생겼습니다.

세종대왕은 어떤 사주인가 — 명식 한눈에 보기

년주
정축
월주
을사
일주
임진
시주
미상
오행 분포
木목
1
火화
2
土토
2
金금
없음
水수
1
항목 내용
이름 세종대왕 (이도, 李祹)
생년월일 1397년 5월 15일 (양력) / 음력 1397년 4월 10일
몰년월일 1450년 3월 30일 (양력 환산) / 음력 1450년 2월 17일
사주(삼주) 년주 정축(丁丑) · 월주 을사(乙巳) · 일주 임진(壬辰)
일간 임(壬) — 양(陽)의 수(水)
십성 구성 상관 1 · 재성 2(정재·편재) · 관성 2(정관·편관) · 인성 0 · 비겁 0
오행 분포 목1 · 화2 · 토2 · 금0 · 수1
부족한 오행 금(金)
신강·신약 신약(身弱) — 일간을 돕는 인성과 비겁이 모두 없음
생시 미상 (삼주 기준 분석)
출처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 총서

이 분석의 데이터 신뢰도 이 글은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 총서에 기록된 음력 생일(태조 6년 4월 10일)을 기준으로 명식을 계산했습니다. 2024년 개정된 「각종 기념일 등에 관한 규정」은 이 탄신일의 양력 환산일인 5월 15일을 '세종대왕 나신 날'로 정하고 있습니다. 생시(時)는 전해지지 않아 시주를 제외한 삼주(三柱) 기준으로 풀이했으며, 시주가 포함될 경우 해석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세종대왕은 그레고리력 시행(1582년) 이전 인물이라 양력 환산값은 적용 역법에 따라 며칠 차이가 날 수 있습니다. 이 글의 명식은 환산된 양력이 아니라 실록에 기록된 음력 원본을 기준으로 계산했습니다.

일간 임수(壬水) — 바다를 닮은 임금

명리학에서 임수는 시냇물이 아니라 강과 바다에 비유되는 큰 물입니다. 그릇이 넓어 무엇이든 받아들이고, 겉으로는 잔잔하나 속으로 깊이 흐릅니다. 계산이 빠르기보다 멀리 보고, 앞에 나서기보다 아래로 스며듭니다.

물의 가장 큰 성질은 낮은 곳으로 흐른다는 것입니다. 훈민정음을 만든 이유가 정확히 그 자리에 있습니다. 제 뜻을 펴지 못하는 백성이 가엾어 새로 스물여덟 자를 만든다는 문장은,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물과 같은 방향을 향합니다.

일주는 임진(壬辰)입니다. 진(辰)은 축축한 흙이면서 물을 갈무리하는 창고 역할을 하는 지지로, 큰 물이 흩어지지 않고 담길 그릇을 만난 형상으로 읽힙니다.

당신의 일간은 무엇일까요? 같은 물이라도 임수(壬水)는 바다이고 계수(癸水)는 빗물입니다. 그릇의 크기가 다르면 사는 방식도 달라집니다.

세종은 왜 '상관(傷官)'의 사람인가 — 창제의 별

월간에 놓인 을목(乙木)은 임수 일간에게 상관(傷官)입니다. 식상 가운데서도 상관은 기존의 규칙과 권위를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별입니다. 당연하다고 여겨지는 전제를 의심하고, 자기 방식의 해답을 만들어냅니다. 창작·저술·발명이 전부 이 자리에서 나옵니다.

물이 나무를 기른다(水生木). 세종의 치세는 무엇보다 만들어 낸 시대였습니다.

  • 훈민정음 — 1443년 12월 임금이 친히 언문 28자를 지었고, 1446년 9월 해례가 완성되며 정인지의 서문이 붙었습니다. 《세종실록》 102권·113권
  • 자격루 — 1434년 7월부터 새 물시계를 썼습니다. 장영실이 자동으로 시각을 알리는 장치를 만들어 보루각에 두었습니다. 《세종실록》 65권
  • 앙부일구 — 1434년 10월 혜정교와 종묘 앞에 처음 설치해 해 그림자를 관측했습니다. 《세종실록》 66권
  • 측우기 — 1441년 서운관에 빗물 받는 그릇을 두었고, 이듬해 '측우기(測雨器)'라는 이름과 규격이 정해졌습니다. 《세종실록》 93권·96권
  • 칠정산 — 조선의 실정에 맞는 역법입니다. (편찬 시점은 통설로 내편 1442년, 외편 1444년으로 봅니다)

창제를 기록한 실록의 첫 문장은 이렇습니다.

임금이 친히 언문 스물여덟 자를 지었다.
上親制諺文二十八字
— 《세종실록 102권, 세종 25년 12월 30일》

임금이 직접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낸 사례는 동아시아 왕조사 전체에서도 드뭅니다.

그런데 상관은 구설과 충돌의 별로도 불립니다. 기존 질서를 의심하는 기운이니 당연한 일이죠. 실제로 훈민정음은 거센 반대에 부딪혔습니다. 창제 두 달 뒤인 1444년 2월,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를 비롯한 일곱 명이 언문 제작의 부당함을 아뢰는 상소를 올렸습니다. 이들은 의금부에 갇혔다가 이튿날 풀려났고, 정창손만 파직되었습니다. — 《세종실록》 103권, 세종 26년 2월 20일

다만 세종의 명식에는 관성(官星)이 둘 있습니다. 반대한 신하를 하루 만에 풀어주고 한 사람만 문책한 처분은, 그 충돌이 제도 밖으로 튀지 않고 제도 안에서 조율된 모습으로 읽어볼 수 있습니다.

당신의 명식에도 상관이 있다면, 지금 당신을 답답하게 만드는 규칙이 하나쯤 떠오를 겁니다. 그게 상관의 자리입니다.

금(金)이 없다는 것 — 임금이 되고도 장인을 잃은 이유

임수 일간에게 금은 인성(印星)입니다. 나를 낳고 길러주며 자격과 명분과 보호막을 주는 자리예요. 학벌·후원·정통성처럼 '주어지는 것'이 전부 여기에 속합니다. 세종에게는 그게 하나도 없습니다.

역사를 보면 그는 실제로 왕이 되도록 예정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태종의 셋째 아들이었고, 세자 자리에는 맏형 양녕대군이 있었습니다. 1418년 6월 3일 세자 이제가 폐위되고 바로 그날 충녕대군이 왕세자로 책립됩니다. 실록이 적은 이유는 이렇습니다.

충녕 대군은 천성이 총명하고 민첩하고
— 《태종실록 35권, 태종 18년 6월 3일》

순서로 물려받은 자리가 아니라 자질을 근거로 옮겨 온 자리였습니다. 그리고 두 달 뒤, 스물한 살에 왕위에 올랐습니다.

그런데 즉위한 바로 그해 겨울, 그는 장인을 잃습니다.

1418년 12월, 상왕으로 물러난 태종이 소헌왕후의 아버지 심온에게 사약을 내리기로 결정했고, 이틀 뒤 심온의 졸기가 실렸습니다. 임금이 되었는데 자기 처가를 지키지 못한 것입니다. 태종은 세종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네 비(妃)의 집은 상패하였다.
— 《세종실록 2권, 세종 즉위년 12월 25일》

인성이 비어 있다는 것은 기대야 할 배경도, 나를 막아설 방패도 없다는 뜻입니다. 왕좌에 앉고도 가장 가까운 사람을 지킬 수 없었던 그해가, 이 명식을 가장 잔인하게 보여준 순간으로 겹쳐 읽힙니다.

그래서였을까요. 즉위 2년째인 1420년 3월, 세종은 집현전의 인원을 정하고 관원을 임명해 학문 연구기관으로 정비합니다. 임명된 관원은 모두 경연관을 겸했습니다. — 《세종실록》 7권, 세종 2년 3월 16일

없는 인성을 스스로 지어낸 것으로 읽을 만합니다.

당신의 명식에도 비어 있는 오행이 있을까요? 물려받은 것이 있는 사람인지, 없는 것을 스스로 채워야 하는 사람인지는 열어봐야 압니다.

대운으로 본 세종의 일생 — 무엇이 언제 일어났나

사주가 타고난 그릇이라면 대운(大運)은 10년마다 바뀌는 계절입니다. 세종은 음(陰)의 해에 태어난 남자라 대운이 역행하며, 세 살부터 10년 단위로 흐릅니다.

살아 있는 사람의 대운은 앞날을 짐작하는 데 그치지만, 이미 생애가 끝난 인물은 대조가 가능합니다. 실록이 남긴 연도와 나란히 놓으면 이렇게 됩니다.

대운(大運)의 흐름
갑진
3세~
관성
계묘
13세~
상관·식상
1418년(21세) 세자 책립과 즉위. 그해 겨울 장인 심온 사사
임인
23세~
상관·식상
1420년(23세) 집현전 정비 — 학문의 근거지를 만들다
신축
33세~
관성
1430년(33세) 공법 찬반 조사 · 1433년 파저강 정벌 · 1434년 자격루와 앙부일구. 같은 시기 풍질과 안질이 시작되다
경자
43세~
비겁
1441년(44세) 측우기 · 1443년(46세) 훈민정음 창제 · 1446년(49세) 반포. 같은 해 소헌왕후 승하
기해
53세~
비겁
1450년(53세) 승하

배열이 상당히 선명합니다.

식상(상관) 대운 13~32세에는 만들기 위한 바탕을 놓았습니다. 즉위 직후 가장 먼저 한 일이 집현전 정비였다는 점이 이 시기의 성격을 보여줍니다.

관성 대운 33~42세에는 제도와 통치의 일이 몰렸습니다. 공법 찬반 조사, 북방 정벌, 관측 기구 제작이 전부 이 10년에 있습니다. 관성은 규율과 책임의 별이니 어울리는 시기죠. 그런데 바로 이 시기에 병도 함께 왔습니다. 관성인 토(土)는 일간인 수(水)를 극하는 오행이고, 세종은 본래 신약한 명식입니다. 성취와 소모가 같은 자리에서 나온 셈입니다.

비겁 대운 43세 이후에는 흐름이 바뀝니다. 비겁은 일간과 같은 수(水)의 기운으로, 명식에 하나도 없던 '내 편'이 뒤늦게 들어오는 시기입니다. 평생 자기를 도와줄 것이 없던 사람에게 마흔셋에야 자기 기운이 들어찬 것입니다.

그리고 훈민정음이 나온 것이 바로 이때입니다.

신선당에서 바로 확인
내 대운은 지금 어느 계절일까?
세종은 마흔셋에야 자기 기운이 들어찼습니다. 생년월일만 넣으면 내 10년 흐름을 바로 볼 수 있습니다.

세종은 왜 그토록 자주 아팠을까 — 실록이 기록한 병

세종의 병약함은 후대의 추측이 아니라 본인의 입에서 나온 기록입니다. 1439년, 강무를 세자에게 대신 맡기자는 논의 자리에서 그는 자신의 병을 하나하나 늘어놓습니다.

젊어서부터 한쪽 다리가 아팠고, 등에 부종이 있었으며, 소갈증을 앓은 지 13~14년이라 했습니다. 소갈증은 오늘날의 당뇨입니다. 전해 여름에는 임질로 오래 정사를 보지 못했고, 왼쪽 눈에는 막이 끼고 오른쪽 눈도 흐려졌다고 했습니다. — 《세종실록》 85권, 세종 21년 6월 21일

두 해 뒤에는 승정원에 이렇게 전합니다.

내가 안질을 얻은 지 이제 10년이 되었다.
予得眼疾, 今已十年
— 《세종실록 92권, 세종 23년 2월 20일》

그러고는 대조회와 조참을 줄이고, 향과 축문을 직접 쓰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풍질에 대해서는 더 이른 1431년에 김종서에게 발병 경위를 설명한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한여름 낮에 창가에 누워 잠들었다가 양 어깨 사이가 찌르듯 아팠고, 며칠 뒤 재발하며 부었다는 것입니다. — 《세종실록》 53권, 세종 13년 8월 18일

역산해 보면 소갈증은 20대 후반에, 안질과 풍질은 30대 중반에 시작되었습니다. 뒤의 두 병이 시작된 시기가 앞서 본 관성 대운(33~42세)과 겹치고, 병을 한꺼번에 늘어놓은 1439년 역시 그 대운의 끝자락입니다.

명리에서 임수 일간에게 수(水)는 신장과 방광의 기운으로 봅니다. 세종의 명식에는 수가 일간 하나뿐인데 그것을 극하는 토(土)가 둘이고, 병이 겹치던 그 10년의 대운마저 토였습니다. 물이 마르는 형상이라 할 만합니다. 소갈증의 '소갈(消渴)'이라는 이름 자체가 끊임없이 목이 마르다는 뜻이라는 점은, 우연이라 해도 서늘한 대목입니다.

다만 이는 사료에 기록된 병증과 명식을 나란히 놓고 읽은 해석이며, 명리로 질병을 진단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세종의 가정 — 소헌왕후 심씨와 여덟 아들

사주에서 배우자 자리는 일지(日支)로 봅니다. 세종의 일지는 진토(辰土), 편관(偏官)입니다. 흔히 편관이 배우자궁에 있으면 관계에 굴곡이 많다고 풀이하죠.

그런데 실제 기록은 그 통설을 따르지 않습니다. 세종은 열두 살이던 1408년 심온의 딸에게 장가들었고, 실록은 이 혼인을 딱 한 문장으로 적었습니다. "충녕군이 우부대언 심온의 딸에게 장가들다." — 《태종실록》 15권, 태종 8년 2월 16일

두 사람은 8남 2녀를 두었고, 소헌왕후는 1446년 3월 세상을 떠날 때까지 38년을 함께했습니다. 정인지가 지은 영릉 지문에 "왕후는 8남 2녀를 낳았다"고 적혀 있으며, 향년 52세였습니다. — 《세종실록》 111권·112권

굴곡은 부부 사이가 아니라 바깥에서 왔습니다. 즉위하던 해에 아내의 아버지가 사사되었고, 그 일을 막을 수 없었죠. 배우자궁의 편관을 굳이 읽는다면 배우자와의 불화가 아니라 처가에 닥친 시련으로 나타난 셈입니다.

그리고 소헌왕후가 세상을 떠난 1446년, 바로 그해 9월에 훈민정음 해례가 완성됩니다. 아내를 잃은 해에 평생의 업적을 세상에 내놓은 것입니다.

재물과 통치 — 화(재성)와 토(관성)

세종의 명식에는 재성인 화(火)가 둘, 관성인 토(土)가 둘 있습니다. 재성은 현실 감각과 재물을, 관성은 통치와 규율과 책임을 뜻합니다. 신약한 일간에 재성과 관성이 넉넉한 구조는 개인에게는 감당이 버거운 형태지만, 그가 다룬 재물은 개인의 것이 아니라 나라의 살림이었습니다.

세법을 고치는 공법(貢法)을 추진하면서 세종은 전·현직 관리와 백성에게 가부를 묻게 했고, 1430년 8월 호조가 결과를 보고했습니다. 찬성 9만 8천 6백 57명, 반대 7만 4천 1백 49명. 도합 17만이 넘는 응답이었습니다. 지역별로는 경상도가 3만 6천여 명 찬성에 반대 377명이었던 반면, 평안도는 찬성 1천여 명에 반대가 2만 8천여 명으로 정반대였습니다. — 《세종실록》 49권, 세종 12년 8월 10일

주목할 점은 찬성이 더 많았는데도 세종이 이때 곧바로 시행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반대가 몰린 지역의 사정을 더 살피는 쪽을 택했고, 공법은 이후 오랜 논의를 거쳐 다듬어졌습니다. 이상을 앞세워 밀어붙이지 않고 현실의 반응을 확인한 뒤 제도를 고쳐 간 방식은, 재성의 실용성과 관성의 신중함이 함께 작동한 모습으로 읽힙니다.

북방 경영도 관성이 맡는 영역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도 하나 짚고 가야 합니다.

4군 6진은 세종이 다 만든 것이 아닙니다.

4군 가운데 여연군은 이미 태종 16년(1416년)에 설치되어 있었고, 세종 대에 자성군(1433년)·무창군·우예군(1443년)이 더해지며 4군 체제가 갖춰졌습니다. 6진 역시 회령(1434년)·종성(1435년)·온성(1440년)을 거쳐 1449년 부령도호부 설치로 완성되기까지 30년 가까이 걸린 사업이었습니다. 한 번에 그은 국경선이 아니라 오래 밀고 나간 축적의 결과였습니다. — 《세종실록》 지리지 154권·155권

세종의 인생 패턴 한 줄

이 명식에서 반복되는 흐름을 한 줄로 줄이면 이렇게 됩니다.

비어 있음 → 스스로 채움 → 몸이 무너짐 → 그래도 만들어 냄

물려받은 명분이 없어 집현전을 세웠고, 기댈 세력이 없어 백성에게 직접 물었으며, 몸이 무너져 가는 30대를 통치로 채웠고, 마흔이 넘어 글자를 만들었습니다. 없는 것에서 시작해 끝내 만들어 내는 사람. 상관과 관성이 함께 놓인 신약한 명식이 살아낸 방식입니다.

자주 묻는 질문

세종대왕의 일간은 무엇인가요?

세종대왕의 일간은 임(壬), 곧 양(陽)의 수(水)입니다. 일주 전체로는 임진(壬辰)일주에 해당하며, 큰 강물이 그것을 담을 그릇을 만난 형상으로 해석됩니다.

세종대왕의 생년월일은 언제인가요?

양력 1397년 5월 15일, 음력으로는 태조 6년 4월 10일입니다.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 총서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2024년 개정된 「각종 기념일 등에 관한 규정」은 5월 15일을 '세종대왕 나신 날'로 정하고 있습니다. 같은 날인 스승의 날이 세종대왕 탄신일에서 비롯되었다는 설명도 널리 알려져 있으나, 이는 통설이며 해당 규정이 밝힌 스승의 날의 공식 취지는 교권 확립에 있습니다.

세종대왕에게 부족한 오행은 무엇인가요?

금(金)입니다. 삼주 안에 금 기운이 하나도 없으며, 임수 일간에게 금은 인성(印星)에 해당합니다. 물려받은 명분보다 스스로 이룬 성취가 두드러진 그의 생애와 겹쳐 읽히는 대목입니다.

세종대왕은 상관격인가요?

월간 을목이 임수 일간에게 상관(傷官)에 해당합니다. 격국을 어떻게 잡느냐는 유파에 따라 다르지만, 상관이 이 명식의 성격을 가장 잘 드러내는 별인 것은 분명합니다. 훈민정음을 비롯한 창제의 업적이 여기서 나온 것으로 읽힙니다.

세종대왕은 어떤 병을 앓았나요?

실록에 남은 세종 본인의 말에 따르면 소갈증(당뇨)·안질·풍질을 오래 앓았고, 다리 통증과 부종도 있었습니다. 1439년 기록에서 소갈증을 앓은 지 13~14년이라 했으므로 20대 후반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입니다.

총평 — 세종대왕 사주 한 줄 정리

세종대왕의 사주는 자기를 도와줄 것이 하나도 없는 신약한 임수(壬水) 일간에, 만들어내는 별인 상관(傷官)과 다스리는 별인 관성(官星)이 함께 놓인 구조입니다.

물려받을 명분도(인성 0), 곁을 지켜줄 세력도(비겁 0) 없이 셋째 아들로 왕좌에 올랐고, 즉위하던 해에 장인을 잃었습니다. 대신 그는 없는 것을 스스로 지어냈습니다. 그리고 마흔셋, 비로소 자기 기운이 들어차는 대운에 이르러 글자를 만들었습니다.

비어 있음을 탓하지 않고 채워 넣은 명식. 세종대왕의 사주는 그렇게 요약할 수 있습니다.


나와 세종대왕의 사주는 얼마나 닮았을까?

세종의 임수(壬水) 기운과 만들어내는 상관의 힘이, 내 사주에도 흐르고 있을까요? 생년월일만 넣으면 나와 가장 닮은 위인과 오행 일치율을 바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나와 닮은 위인 찾기 — 신선당 →

이어서 궁금해지는 것들

신선의 말씀
짐이 그대에게 이르노니, 명(命)은 정해진 운명이 아니라 타고난 그릇이니라.
세종은 비어 있던 금(金)을 탓하지 않고 스스로 채웠다.
그대의 그릇에 비어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을 아는 일이 곧 시작이니라.


출처와 정정에 대하여

이 글의 역사적 사실은 국사편찬위원회가 공개한 《조선왕조실록》 원문을 직접 확인해 인용했고, 인용한 곳마다 편명과 권수·날짜를 밝혔습니다. 실록에서 확인되지 않은 것은 '통설'로 구분했습니다.

사주 해석과 대운 풀이는 사료가 아니라 명리학에 근거한 저희의 해석입니다. 특히 질병에 관한 대목은 기록과 명식을 나란히 놓고 읽은 것일 뿐, 명리로 병을 진단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사실과 다른 내용이 있다면 알려주세요. 확인 후 바로잡고, 정정 사실과 날짜를 이 자리에 남기겠습니다.

참고 자료: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 총서·2권·7권·49권·53권·65권·66권·85권·92권·93권·96권·102권·103권·111권·112권·113권·154권·155권, 《태종실록》 15권·35권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sillok.history.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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