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수대비는 배운 적 없는 것을 가르쳤다 — 《내훈》을 쓴 사람의 빈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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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려줄 것이 하나도 없던 임금 |
옥황상제 신선의 말씀 |
광해군(1575~1641)의 명식을 열면 지금까지 여섯 편과 완전히 다른 게 나옵니다.
일간이 갑목(甲木)입니다. 명리에서 갑목은 풀이나 덩굴이 아니라 아름드리 큰 나무에 비유됩니다. 곧게 자라고, 위로 뻗고, 잘 굽히지 않죠.
그런데 큰 나무는 그냥 크기만 해서는 쓸모가 없습니다. 도끼로 다듬어야 기둥이 되고 서까래가 됩니다. 명리에서 갑목에게 그 도끼는 금(金), 곧 관성(官星)입니다. 나를 다스리고 눌러주는 기운이죠.
광해군의 명식에는 그 금이 하나도 없습니다.
년주 을해 | 월주 임오 | 일주 갑오 | 시주 미상 |
| 木목 | 2 | |
| 火화 | 2 | |
| 土토 | 없음 | |
| 金금 | 없음 | |
| 水수 | 2 |
| 항목 | 내용 |
|---|---|
| 이름 | 광해군 (光海君) — 본명 이혼(李琿) |
| 생년월일 | 음력 1575년 4월 26일 (선조 8년) |
| 몰년월일 | 음력 1641년 7월 1일 (67세), 제주 |
| 사주(삼주) | 을해(乙亥)년 · 임오(壬午)월 · 갑오(甲午)일 |
| 일간 | 갑(甲) — 양(陽)의 목(木), 큰 나무 |
| 십성 구성 | 비겁1 · 식상2 · 재성 0 · 관성 0 · 인성2 |
| 오행 분포 | 목2 · 화2 · 토 0 · 금 0 · 수2 |
| 부족한 오행 | 토(土)와 금(金) |
| 신강·신약 | 신강(身强) |
| 생시 | 미상 (삼주 기준) |
| 출처 | 인조실록 · 국조보감 · 국사편찬위원회 |
이 글에는 먼저 밝혀둘 것이 있습니다. 광해군이 태어난 날을 실록에서 찾지 못했습니다. 선조실록 초기가 매우 소략한 데다 후궁 소생 둘째 아들이라, 탄생을 알리는 기사가 남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이 글의 명식은 국사편찬위원회가 정리한 기록(음력 1575년 4월 26일)에 근거합니다. 폐위와 죽음은 다릅니다. 인조실록과 국조보감 원문을 직접 열어 확인했습니다. 어느 대목이 어느 자료에서 왔는지는 그때그때 밝히겠습니다. 바로 앞 글에서 연산군은 실록에 태어난 시각까지 남아 있었습니다. 같은 폐주인데 기록의 두께가 이렇게 다릅니다.
앞서 다룬 인물들과 견주면 차이가 분명해집니다.
이순신은 경금(庚金), 곧 두드려야 날이 서는 무쇠였습니다. 그의 명식에는 그 쇠를 달굴 불이 둘 있었죠. 관성이 둘이었습니다. 벼려질 조건을 갖춘 셈입니다.
광해군은 반대입니다. 나무는 크게 자랐는데 그것을 다듬을 도끼가 없습니다.
여기에 하나가 더 겹칩니다. 이 명식은 신강(身强)입니다. 일간 자체가 힘이 센 구조예요. 저희가 여섯 편을 쓰는 동안 전부 신약이었는데, 처음으로 강한 사주가 나왔습니다.
강한데 눌러줄 것이 없습니다. 명리에서 이런 구조를 좋다고도 나쁘다고도 하지 않습니다. 다만 스스로 멈추는 힘을 기르지 못하면 위험하다고는 봅니다.
당신의 명식에는 브레이크가 있나요? 나를 눌러주는 기운이 답답하게 느껴질 때도 있지만, 없으면 없는 대로 문제가 생깁니다.
여기서 이 글에서 가장 이상한 이야기를 해야겠습니다.
폐위된 임금의 재위 기록을 「실록」이 아니라 「일기」로 부른다는 것은 바로 앞 글에서 말씀드렸습니다. 광해군도 「광해군일기」입니다.
그런데 국사편찬위원회가 공개한 실록 목록을 열어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 15대 | 광해군중초본 |
|---|---|
| 15대 | 광해군정초본 |
한 임금의 치세인데 일기가 두 벌입니다.
중간에 정리한 초고(중초본)와 최종본(정초본)이 둘 다 남아 별도로 제공되고 있습니다. 저희가 이순신 편에서 선조실록과 선조수정실록을 구분해 읽었던 것과 같은 구조입니다. 하나의 사실에 기록이 둘인 것이죠.
두 판본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다른지는 저희가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다만 하나의 치세를 적은 글이 두 벌 남아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 임금에 대한 기록이 간단치 않다는 것은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기록을 만든 쪽은 그를 몰아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글은 그의 폭정을 판정하지 않습니다.
사주가 타고난 그릇이라면 대운은 10년마다 바뀌는 계절입니다. 광해군은 두 살부터 10년 단위로 흘렀습니다.
신사 2세~ | 식상 | |
경진 12세~ | 재성 1592년(18세) 임진왜란 중 세자로 책봉되다 | |
기묘 22세~ | 비겁 | |
무인 32세~ | 비겁 1608년(34세) 즉위 · 1613년(39세) 계축옥사 | |
정축 42세~ | 재성 1623년(49세) 폐위, 강화로 쫓겨나다 | |
병자 52세~ | 인성 | |
을해 62세~ | 인성 1641년(67세) 제주에서 죽다 |
서른둘부터 마흔하나까지가 비겁(比劫) 대운입니다. 비겁은 나와 같은 기운, 곧 제 편입니다. 즉위한 것이 정확히 이 시기예요.
그런데 이 명식은 이미 신강합니다. 강한 일간에 제 편 기운이 더해지는데, 정작 눌러줄 관성은 0입니다. 브레이크가 없는 차에 가속이 붙는 형상이라고 하면 지나칠까요.
세자가 된 것은 훨씬 이릅니다. 열여덟, 임진왜란으로 파천하기 직전이었습니다. 총명하고 학문을 좋아한다는 이유로 급히 세워졌죠. 전쟁이 그를 세웠습니다.
저희가 바로 앞에 다룬 연산군과 나란히 놓으면 이렇게 됩니다.
| 일간 | 비어 있는 자리 | 힘 | 무너진 이유 | |
|---|---|---|---|---|
| 연산군 | 정화(丁火) — 등불 | 인성 0 | 신약 | 지켜주는 것이 없었다 |
| 광해군 | 갑목(甲木) — 큰 나무 | 관성 0 | 신강 | 말려주는 것이 없었다 |
같은 자리에서 쫓겨난 두 임금인데 비어 있던 자리가 정반대입니다. 하나는 자기를 받쳐줄 것이 없었고, 하나는 자기를 멈춰 세울 것이 없었습니다.
폐위 장면은 인조실록에 이렇게 남았습니다.
그날 기사의 제목은 「의병을 일으켜 즉위하다」입니다. 쫓아낸 쪽의 시선으로 적힌 제목이죠.
반정 세력이 내건 명분도 함께 적혀 있습니다. 우리 부모를 도륙하고, 종족을 어육으로 만들고, 어린 자식을 죽이고, 모후를 별궁에 가두었다는 것입니다. 계축옥사와 영창대군, 그리고 인목대비를 서궁으로 옮긴 일을 가리킵니다.
저희는 이 명분이 옳았는지 판정하지 않습니다. 이긴 쪽이 기록에 남긴 말이라는 점만 밝혀둡니다.
여기서 짚고 갈 것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앞 글에서 저희는 연산군의 인성 0을 어머니의 자리로 읽었습니다. 일곱 살에 어머니를 잃은 그의 생애와 맞물렸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광해군은 인성이 둘입니다. 그리고 어머니 공빈 김씨는 그가 태어난 지 3년 뒤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연산군보다 더 이른 나이에 어머니를 잃은 겁니다.
인성이 곧 어머니라면 이 사주는 설명되지 않습니다.
명리에서 인성은 본래 나를 낳고 지켜주는 것 전반입니다. 부모일 수도 있고, 뒷배나 명분이나 배움일 수도 있습니다. 연산군 편에서 어머니로 읽은 것은 그 사람의 생애가 그렇게 맞물렸기 때문이지, 인성이 어머니라는 뜻은 아니었습니다.
같은 자리도 사람마다 다른 모양으로 나타납니다. 사주를 볼 때 공식을 외우는 것보다 이 점이 훨씬 중요합니다.
여기서 연산군과 또 갈립니다.
연산군은 폐위되고 두 달 만에 죽었습니다. 광해군은 열아홉 해를 더 살았습니다.
강화로 갔다가 교동을 거쳐 제주까지 옮겨졌습니다. 그리고 1641년, 예순일곱에 제주에서 죽습니다. 조정이 그 소식을 들은 것은 그해 8월이었습니다. 제주에서 한양까지 부고가 오는 데 걸린 시간이죠.
소선은 고기를 뺀 밥상입니다.
자기가 몰아낸 임금의 부고에, 인조는 사흘 동안 고기를 끊었습니다. 이 대목을 어떻게 읽을지는 읽는 분께 맡기겠습니다.
이 명식에서 반복되는 흐름을 한 줄로 줄이면 이렇게 됩니다.
크게 자란 나무였습니다. 다만 그 나무를 다듬어 기둥으로 만들어 줄 도끼가 없었고, 스스로 멈추는 법도 배우지 못했습니다.
갑(甲), 곧 양(陽)의 목(木)입니다. 일주 전체로는 갑오(甲午)일주에 해당합니다. 명리에서 갑목은 덩굴이나 풀이 아니라 아름드리 큰 나무에 비유되며, 도끼(금)로 다듬어야 재목이 된다고 봅니다.
음력 1575년 4월 26일, 선조 8년입니다. 다만 저희는 이 날짜를 실록에서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선조실록 초기가 소략해 탄생 기사가 남지 않은 것으로 보이며, 이 글은 국사편찬위원회가 정리한 기록을 따랐습니다.
토(土)와 금(金) 두 가지입니다. 갑목 일간에게 토는 재성, 금은 관성입니다. 특히 관성이 0이라는 것은 나를 눌러 다스리는 기운이 없다는 뜻입니다.
1623년 3월 반정으로 쫓겨났습니다. 반정 세력은 계축옥사와 영창대군의 일, 인목대비를 서궁에 가둔 일을 명분으로 내걸었고, 그 문장이 인조실록에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다만 그 기록은 이긴 쪽이 남긴 것이며, 저희는 옳고 그름을 판정하지 않습니다.
국사편찬위원회는 「광해군일기」를 중초본(中草本)과 정초본(正草本) 두 가지로 나누어 제공합니다. 정리 중이던 초고와 최종본이 둘 다 남았기 때문입니다. 두 판본의 구체적 차이는 이 글에서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광해군의 사주는 크게 자란 나무(갑목)에, 그것을 다듬을 도끼(관성)가 하나도 없고, 일간 자체는 강한 구조입니다.
전쟁이 그를 세자로 세웠고, 서른넷에 임금이 되었으며, 마흔아홉에 쫓겨났습니다. 그리고 유배지에서 열아홉 해를 더 살다 제주에서 죽었습니다.
강한 것이 문제가 아니라 멈출 것이 없었던 것이 문제였다는 쪽에 가깝습니다. 연산군의 사주가 받쳐줄 것이 없어 무너진 이야기였다면, 이쪽은 세워줄 것은 있었으나 눌러줄 것이 없던 이야기입니다.
광해군의 갑목(甲木) 기운과 비어 있던 관성의 자리가 내 사주에도 있을까요? 생년월일만 넣으면 나와 가장 닮은 인물과 오행 일치율을 바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옥황상제 신선의 말씀 |
이 글의 폐위와 죽음은 국사편찬위원회가 공개한 《인조실록》 원문과 《국조보감》 원문을 직접 확인해 인용했습니다. 다만 명식의 바탕이 되는 생년월일은 실록에서 찾지 못해 국사편찬위원회가 정리한 기록을 따랐고, 그 점을 본문 앞부분에 밝혔습니다.
「광해군일기」는 그를 몰아낸 쪽이 편찬한 기록이라, 이 글에서는 폭정에 관한 서술을 다루지 않았습니다. 폐위 명분도 반정 세력이 내건 말로만 적었습니다.
사주 해석과 대운 풀이는 사료가 아니라 명리학에 근거한 저희의 해석입니다.
사실과 다른 내용이 있다면 알려주세요. 확인 후 바로잡고, 정정 사실과 날짜를 이 자리에 남기겠습니다.
참고 자료: 《인조실록》 인조 1년 3월 13일, 《국조보감》 권36 인조조 (한국고전번역원 한국고전종합DB db.itkc.or.kr ·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sillok.history.go.kr) ·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