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수대비는 배운 적 없는 것을 가르쳤다 — 《내훈》을 쓴 사람의 빈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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받은 적 없는 것을 물려준 사람 조선 여성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정한 책이 있습니다. 《내훈(內訓)》입니다. 3권 4책으로, 언행과 효친과 혼례를 다루고, 부부를 다루고, 어머니 노릇과 화목과 검약을 다룹니다. 조선 내내 양반가 여성 교육의 기본서였습니다. 그 책을 쓴 사람의 명식에는 배움의 자리가 없습니다. 이 사주에는 한 가지 핵심 모순이 있습니다 명리에서 나를 가르치고 길러주는 기운을 인성(印星) 이라고 부릅니다. 어머니, 스승, 배움, 문서, 그리고 나를 보호하는 것 전부가 이 자리에 들어갑니다. 인수대비의 여덟 글자에서 이 자리는 0개 입니다. 받은 것이 없는 사람이, 무엇을 어떻게 받아야 하는지를 적은 책을 남겼습니다. 채워진 사람이 나눈 것이 아니라, 비어 있던 사람이 물려준 것입니다.

장영실은 태어난 날이 없다 — 사주를 볼 수 없는 위인들

이름 칸만 적히고 생년월일 자리가 비어 있는 옛 기록부 — 사주를 세울 수 없는 인물들을 그린 대표 이미지
태어난 날이 적히지 않은 사람들


신선당은 지금까지 여덟 사람의 사주를 읽었습니다. 세종, 이순신, 정조, 신사임당, 정약용, 연산군, 광해군, 문정왕후.

오늘은 읽을 수 없는 사람들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이 글에는 한 가지 핵심 모순이 있습니다

연산군이 언제 태어났는지 저희는 분 단위에 가깝게 압니다. 성종실록이 이렇게 적었기 때문입니다.

전날밤 3경 5점에 원자가 탄생하였다
— 《성종실록, 성종 7년(1476) 11월 7일》

3경은 밤 열한 시부터 새벽 한 시, 5점은 그중 마지막 구간이니 자정을 막 넘긴 무렵입니다. 그래서 저희는 연산군의 사주에 시주까지 세울 수 있었습니다.

같은 나라, 같은 기록 체계 안에서 장영실은 태어난 해조차 전하지 않습니다.

세종이 "이 사람이 아니었으면 만들지 못했을 것"이라고 못 박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태어난 날이 없습니다.

기록이 없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적을지 고른 손이 있었습니다.

사주를 세울 수 없다는 것은 이런 뜻입니다

사주는 태어난 해·달·날·시를 각각 두 글자씩 옮겨 여덟 글자로 만듭니다. 네 기둥이라 사주(四柱)입니다.

오늘 다루는 사람들의 명식은 이렇게 생겼습니다.

년주
미상
월주
미상
일주
미상
시주
미상

빈칸입니다. 하나도 채울 수 없습니다.

신선당에서 바로 확인
내 명식에는 몇 글자가 채워질까?
생년월일만 있으면 여덟 글자가 다 나옵니다. 가입도, 결제도 없습니다.

세종의 명식이나 정조의 명식과 나란히 놓고 보시면 차이가 분명합니다. 저 자리를 채우려면 날짜가 있어야 합니다. 없으면 여덟 글자 중 단 한 글자도 세울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인터넷에는 이들의 사주 풀이가 돌아다닙니다. 어디서 온 날짜일까요.

사서가 스스로 "모른다"고 적은 사람들

가장 정직한 기록은 오히려 이쪽입니다.

《삼국사기》 권44 열전은 을지문덕 조를 이렇게 시작합니다.

그 세계(世系)를 알 수 없다
— 《삼국사기 권44 열전4 을지문덕》

살수에서 수나라 대군을 무너뜨린 사람입니다. 흔히 수십만이라 전해지는 군세였다고 하지요. 그 사람의 전기를 쓰면서 사관이 첫 문장에 적은 것이 "모른다"였습니다. 이어지는 문장은 자질이 침착하고 용맹하며 지략과 술수가 뛰어났다는 평입니다. 사람됨은 적었는데 출신은 못 적은 것입니다.

계백은 더합니다. 《삼국사기》 권47 열전이 그의 출신에 대해 남긴 것은 이것이 전부입니다.

계백은 백제 사람이다. 벼슬하여 달솔이 되었다
— 《삼국사기 권47 열전7 계백》

황산벌에서 결사대를 이끌고 신라의 대군을 맞선 사람입니다. 흔히 오천 대 오만이라 이야기되지요. 그 사람에게 사서가 준 줄이 두 줄입니다. 태어난 해는 없습니다.

모른다고 적은 기록은, 지어낸 기록보다 낫습니다.

기록이 아니라 이야기로 남은 사람

황진이는 경우가 다릅니다. 그는 잊힌 것이 아니라 다르게 남았습니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의 정리에 따르면 황진이는 중종 때 사람이지만 직접적인 사서 기록이 없어 여러 일화로만 자취가 전합니다. 개성(송도) 사람이고, 박연폭포·서경덕과 함께 '송도삼절'로 불렸습니다. 지은 작품 대부분은 없어지고 시조 여섯 수만 남았습니다.

이름은 누구나 압니다. 시는 지금도 읽힙니다. 그런데 국가가 적은 문서에는 그가 없습니다.

기녀였기 때문입니다. 조선의 공식 기록은 그런 사람의 생일을 적는 문서가 아니었습니다.

출신은 적히고 생일은 적히지 않은 사람

여기가 이 글에서 가장 이상한 대목입니다.

장영실의 생년월일은 전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실록은 그의 부모에 대해서는 적었습니다.

1433년 9월, 세종이 장영실에게 호군 벼슬을 더 주는 일을 신하들과 의논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행 사직 장영실은 그 아비가 본래 원나라 소주·항주 사람이고, 어미는 기생이다
— 《세종실록 · 세종 15년(1433) 9월 16일》

같은 자리에서 세종은 이렇게 덧붙입니다. 이제 자격궁루를 만들었는데, 비록 자신의 가르침을 받아 한 것이지만 "만약 이 사람이 아니더라면 암만해도 만들어 내지 못했을 것"이라고요. 그리고 그것을 만대에 이어 전할 기물이라 했습니다.

이듬해 1434년 7월 1일, 보루각에 새 물시계가 놓입니다. 실록은 세종이 호군 장영실에게 명해 '사신 목인(司辰木人)'을 만들어 시간에 따라 스스로 알리게 했다고 적었습니다. 원문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 사람의 힘을 빌리지 않는다(不假人力).

스스로 시간을 알리는 시계입니다.

시간을 만든 사람의 시간이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1442년

여덟 해 뒤, 실록에 장영실의 이름이 다시 나옵니다. 이번에는 다른 종류의 기사입니다.

대호군 장영실이 안여(安輿)를 감조하였는데, 견실하지 못하여 부러지고 허물어졌으므로 의금부에 내려 국문하게 하였다
— 《세종실록 · 세종 24년(1442) 3월 16일》

안여는 임금이 타는 가마입니다. 그것이 부러졌습니다.

한 달 뒤인 4월 27일, 의금부는 장영실이 안여를 삼가 견고하게 만들지 않아 부러지게 했으니 율이 장 100대에 해당한다고 아룁니다. 세종은 두 등급을 감하라고 명합니다. 함께 처벌 대상이었던 임효돈·최효남은 한 등급 감형, 조순생은 처벌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엿새 뒤, 5월 3일입니다.

이 사람들의 죄는 불경(不敬)에 관계되니, 마땅히 직첩(職牒)을 회수하고 곤장을 집행해야 합니다
— 《세종실록 96권, 세종 24년(1442) 5월 3일》

직첩을 회수한다는 것은 벼슬을 거둔다는 뜻입니다. 곤장 횟수는 적혀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실록 본문에 장영실이라는 이름이 나오는 마지막 기사입니다.

세종 7년부터 세종 24년까지, 열일곱 해 동안 이어지던 이름이 여기서 끊깁니다. 그 뒤로는 나오지 않습니다.

물건은 남았습니다

이상한 것은 그다음입니다.

그가 만든 것들은 실록에 계속 나옵니다.

1505년, 연산군이 보루각을 창덕궁으로 옮기고 간의대는 뜯어버리게 했습니다. 이십일 년 뒤인 1526년에는 관상감이 간의와 혼상을 보수하게 해달라고 청합니다. 그때 관상감은 그 기구들을 이렇게 불렀습니다.

간의·혼상은 세종조 때 만든 것으로
— 《중종실록 57권, 중종 21년(1526) 5월 11일》

"세종조 때 만든 것."

임금의 시대 이름으로 불립니다. 만든 사람의 이름은 없습니다.

물건은 백 년을 남았고, 그것을 만든 사람의 이름은 열일곱 해에서 끊겼습니다.

해는 아는데 달과 날이 없는 사람

허난설헌은 또 다른 경우입니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의 정리에 따르면 그는 1563년에 태어나 1589년에 스물일곱으로 죽었습니다. 본명은 초희, 허균의 누이입니다. 유언에 따라 작품은 불태워졌고, 동생 허균이 중국 시인 주지번에게 준 일부가 중국에서 간행되어 오늘까지 전한다고 합니다.

해는 압니다. 달과 날을 모릅니다.

사주는 연주 하나로 세울 수 없습니다. 태어난 해만으로는 여덟 글자 중 두 글자뿐이고, 그 두 글자로는 일간조차 정할 수 없습니다. 일간은 태어난 날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허난설헌도 명식을 세울 수 없습니다. 조선 최고의 시인 중 한 사람인데도요.

마고할미
마고할미
신선의 말씀
아이고, 내가 이 땅의 산과 강을 빚던 시절에도 그랬단다.
누구의 이름은 돌에 새겨지고, 누구의 이름은 바람에 실려 갔지.
새겨진 것이 더 귀해서가 아니라, 새길 손이 그쪽에 있었을 뿐이야.
이 다섯 사람도 그렇게 흘러갔더구나. 그래도 이름은 남지 않았느냐.

누구의 생일이 기록되었는가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사람 사서가 남긴 것 없는 것
을지문덕 "그 세계를 알 수 없다" 전부
계백 "백제 사람이다. 벼슬하여 달솔이 되었다" 전부
황진이 일화들. 직접적인 사서 기록 없음 전부
장영실 아비는 원나라 사람, 어미는 기생 태어난 해
허난설헌 1563년생 · 1589년 몰 달과 날

같은 시대를 산 사람들의 기록은 어땠을까요.

  • 연산군 — 시각까지 (삼경 오점)
  • 정조 — 날짜까지
  • 문정왕후 — 왕비가 되기 전이라 실록에 탄생 기사가 없습니다

마지막 줄이 흥미롭습니다. 문정왕후조차 왕비가 되기 전의 출생은 실록에 없습니다. 왕가에 들어간 뒤에야 그의 생애가 국가의 기록이 됩니다.

기술자, 장군, 기녀, 시인. 이들이 남긴 결과물은 나라를 바꿨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태어난 날은 아무도 적지 않았습니다.

누구의 생일이 기록되었는가는, 그 사회가 누구를 셈에 넣었는가와 같은 말입니다.

그래서 저희는 여기서 멈춥니다

이 글을 쓰면서 가장 하고 싶었던 말이 이것입니다.

저희도 이 다섯 사람의 사주를 만들 수 있습니다. 활동 시기로 생년을 추정하고, 그럴듯한 달과 날을 골라 넣으면 여덟 글자가 나옵니다. 읽으면 제법 맞는 것처럼 들릴 겁니다.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한 자리를 지어내는 순간 나머지 일곱 자리까지 믿을 수 없게 됩니다. 정조의 사주에 시주가 없다고 저희가 매번 밝히는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적는 것이, 신선당이 가진 유일한 밑천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이 글을 쓸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지어내는 곳은 이 글을 쓸 수 없습니다.


나와 이 사람들의 사주는 얼마나 닮았을까?

이 다섯 사람의 명식은 세울 수 없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의 명식은 세울 수 있습니다. 여러분에게는 태어난 날이 있으니까요.

생년월일만 넣으면 여덟 글자와 오행 분포, 그리고 나와 가장 닮은 인물을 바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내 명식 확인하기 — 신선당 →

이어서 궁금해지는 것들

자주 묻는 질문

장영실의 생년월일은 언제인가요?

전하지 않습니다. 한국학중앙연구원도 태어난 해와 죽은 해를 모두 비워 두었습니다. 1385~1390년경이라는 추정이 돌지만 이는 활동 시기에서 역산한 것이지 기록이 아닙니다. 따라서 장영실의 사주는 세울 수 없습니다.

그럼 인터넷에 있는 장영실 사주는 무엇인가요?

출처를 확인해 보시기를 권합니다. 생년월일이 없는 인물의 사주를 제시하려면 그 날짜가 어디서 왔는지 밝혀야 합니다. 실록에도, 국사편찬위원회 자료에도, 한국학중앙연구원 자료에도 그의 생년월일은 없습니다.

태어난 해만 알아도 사주를 볼 수 있나요?

볼 수 없습니다. 태어난 해는 여덟 글자 중 두 글자(연주)일 뿐입니다. 사주 해석의 기준점인 일간은 태어난 날에서 나오므로, 날짜를 모르면 기준 자체가 서지 않습니다. 허난설헌이 이 경우입니다.

태어난 시간을 모르면 사주를 못 보나요?

볼 수 있습니다. 시주만 비워 두고 나머지 여섯 글자로 읽습니다. 신선당은 정조와 문정왕후의 글에서 「생시 미상」이라고 밝히고 그 자리를 비워 두었습니다. 해와 달과 날이 있으면 읽을 것은 충분히 남습니다.

을지문덕의 생년이 기록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요?

《삼국사기》 자체가 모른다고 적었습니다. 고구려의 기록이 후대에 온전히 전해지지 않았고, 《삼국사기》는 고려 때 편찬되면서 중국 사서와 남은 자료를 종합해 열전을 썼습니다. 편찬자가 확인하지 못한 것을 확인하지 못했다고 적은 것입니다.

총평 — 사주를 볼 수 없는 위인들

여덟 글자는 태어난 날에서 나옵니다. 태어난 날이 기록되지 않으면 아무것도 세울 수 없습니다.

을지문덕과 계백은 사서가 모른다고 적었고, 황진이는 국가의 문서 밖에서 이야기로 남았으며, 장영실은 출신은 적히고 생일은 적히지 않았고, 허난설헌은 해만 남고 달과 날이 사라졌습니다.

같은 시대 왕자의 출생은 삼경 오점까지 적혔습니다.

기록의 빈칸은 우연이 아닙니다. 그 빈칸이 그 시대가 누구를 셈에 넣었는지를 말합니다.



출처와 정정에 대하여

이 글이 인용한 장영실 관련 기사는 국사편찬위원회가 공개한 《세종실록》 원문을, 을지문덕과 계백은 국사편찬위원회 한국 고대 사료 DB의 《삼국사기》를 직접 확인했습니다. 을지문덕·계백 조는 국역만 인용했습니다. 한문 정본을 직접 대조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장영실과 황진이에 대해 태어난 해와 죽은 해가 모두 전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허난설헌이 1563년에 태어나 1589년에 죽었다는 것은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을 따랐습니다. 허난설헌은 해가 전할 뿐 태어난 달과 날은 전하지 않아 명식을 세울 수 없습니다.

살수의 군세, 황산벌의 오천 대 오만은 널리 전해지는 이야기입니다. 저희가 사서 원문으로 대조하지 않았기에 본문에서도 「흔히 ~라 전해진다」로 적었습니다. 이 글에 필요한 것은 병력의 수가 아니라 그들의 생년이 기록되지 않았다는 사실이고, 그쪽은 원문으로 확인했습니다.

「실록 본문에 나오는 마지막 기사」라는 표현은 국사편찬위원회 실록 전문 검색으로 장영실이 언급된 기사 전체 목록을 뽑아 확인한 것입니다. 검색에는 연산군일기·중종실록·명종실록 기사도 잡히지만, 그쪽은 국사편찬위원회가 붙인 각주에만 장영실이 나오고 실록 본문에는 없습니다. 두 건을 직접 열어 확인했습니다.

1442년 5월 3일 이후 장영실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이 글에서 다루지 않았습니다. 여러 이야기가 전하지만 저희가 원문으로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사실과 다른 내용이 있다면 알려주세요. 확인 후 바로잡고, 정정 사실과 날짜를 이 자리에 남기겠습니다.

참고 자료: 《세종실록》 세종 15년 9월 16일 · 16년 7월 1일 · 24년 3월 16일 · 24년 4월 27일 · 24년 5월 3일, 《연산군일기》 연산 11년 11월 24일, 《중종실록》 중종 21년 5월 11일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sillok.history.go.kr) · 《삼국사기》 권44·권47 열전 (국사편찬위원회 한국 고대 사료 DB db.history.go.kr) ·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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