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수대비는 배운 적 없는 것을 가르쳤다 — 《내훈》을 쓴 사람의 빈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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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덟 글자에 지켜줄 것이 하나도 없던 임금 |
연산군(1476~1506)의 명식을 열면 이상하리만치 고른 그림이 나옵니다.
여덟 글자가 거의 균형이 잡혀 있는데 한 가지만 정확히 0입니다. 목(木)입니다.
명리에서 정화(丁火) 일간에게 목은 인성(印星)입니다. 나를 낳고 길러주는 자리, 뒷배와 명분의 자리요. 부모의 자리이기도 합니다.
가진 게 없는 사주가 아닙니다. 딱 하나, 지켜주는 것만 없는 사주입니다.
년주 병신 | 월주 기해 | 일주 정미 | 시주 경자 |
| 木목 | 없음 | |
| 火화 | 2 | |
| 土토 | 2 | |
| 金금 | 2 | |
| 水수 | 2 |
| 항목 | 내용 |
|---|---|
| 이름 | 연산군 (燕山君, 이융 李㦕) |
| 생년월일 | 음력 1476년 11월 7일 자시(子時) — 성종 7년 |
| 몰년월일 | 음력 1506년 11월 6일 (31세) |
| 사주(四柱) | 병신(丙申)년 · 기해(己亥)월 · 정미(丁未)일 · 경자(庚子)시 |
| 일간 | 정(丁) — 음(陰)의 화(火), 등불 |
| 십성 구성 | 비겁1 · 식상2 · 재성2 · 관성2 · 인성 0 |
| 오행 분포 | 목 0 · 화2 · 토2 · 금2 · 수2 |
| 부족한 오행 | 목(木) |
| 신강·신약 | 신약(身弱) |
| 출처 | 성종실록 · 중종실록 |
신선당에서 두 번째로 시(時)까지 아는 사주입니다. 옛사람은 태어난 시각이 거의 남지 않습니다. 그런데 성종실록이 원자의 탄생을 적으면서 '전날밤 3경 5점'이라고 시각까지 남겼습니다. 3경은 밤 11시부터 새벽 1시, 5점은 그중 마지막 구간이니 자정을 막 넘긴 무렵입니다. 그래서 실록도 이 기사를 11월 7일자에 실었죠. 시주까지 넣어 계산하면 목이 없다는 결론이 더 단단해집니다. 네 기둥 여덟 글자를 다 봐도 하나도 없으니까요.
그의 기록에 대해 먼저 밝혀둡니다. 연산군의 재위 기록은 「실록」이 아니라 「연산군일기」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편찬한 쪽은 그를 몰아낸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글은 그의 폭정을 판정하지 않습니다. 태어난 날과 어머니의 죽음, 그리고 마지막 말처럼 성종실록·중종실록에서 직접 확인한 것만 씁니다.
명리에서 병화(丙火)가 하늘의 해라면, 정화는 등불입니다. 촛불이나 화롯불 같은 것이죠.
해는 떠 있기만 해도 밝습니다. 등불은 제 몸이 타 들어가야 주변이 밝아집니다. 그리고 밝힐 수 있는 범위가 좁습니다.
문제는 불이 나무를 태워 커진다는 데 있습니다. 연산군의 명식에는 그 나무가 하나도 없습니다. 땔감이 없는 등불인 셈이죠.
당신의 일간에게는 땔감이 있나요? 같은 기운이라도 이어받을 것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은 타는 방식이 다릅니다.
인성이 없다는 것이 이 사람에게는 아주 이른 나이에 나타났습니다.
성종이 왕비였던 윤씨를 폐하고, 끝내 사약을 내린 기사입니다. 같은 날 이 사실을 서울과 지방에 알리라는 명도 함께 내려졌습니다.
윤씨는 연산군의 어머니였습니다. 그때 그는 일곱 살이었습니다.
명리에서 인성은 나를 낳고 지켜주는 자리입니다. 부모의 자리로도 읽습니다. 물론 인성이 곧 어머니라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뒷배와 명분 전반을 뜻하는 자리니까요. 다만 이 사람의 경우, 비어 있는 그 자리가 실제로 어떤 모양이었는지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사주가 타고난 그릇이라면 대운은 10년마다 바뀌는 계절입니다. 연산군은 두 살부터 10년 단위로 흘렀습니다.
경자 2세~ | 관성 1482년(7세) 어머니 윤씨가 사사되다 | |
신축 12세~ | 식상 1494년(18세, 12월) 왕위에 오르다 | |
임인 22세~ | 인성 1498년(23세) 무오사화 | |
계묘 32세~ | 인성 1504년(29세) 갑자사화 · 1506년(31세) 폐위와 죽음 | |
갑진 42세~ | 식상 | |
을사 52세~ | 비겁 |
여기서 서늘한 대목이 나옵니다.
스물둘부터 마흔하나까지 스무 해가 목(木) 대운입니다. 평생 여덟 글자 어디에도 없던 인성이, 이때 처음 들어옵니다.
보통은 좋은 신호로 읽습니다. 신약한 일간에게 인성은 힘을 보태주는 기운이니까요. 그런데 그가 무너진 것이 정확히 이 스무 해 안입니다. 무오사화가 스물셋, 갑자사화가 스물아홉, 폐위와 죽음이 서른하나입니다.
없던 것이 돌아왔는데, 돌아온 그 자리에서 무너졌습니다.
여기서 이 글에서 가장 이상한 이야기를 해야겠습니다.
저희가 바로 앞에 다룬 정약용의 명식을 기억하시나요?
| 일간 | 비어 있는 자리 | 그 자리의 뜻 | |
|---|---|---|---|
| 정약용 | 정화(丁火) | 목(木) | 지켜주는 것이 없다 |
| 연산군 | 정화(丁火) | 목(木) | 지켜주는 것이 없다 |
일간도 같고, 비어 있는 자리도 같습니다.
그 자리의 뜻까지 같습니다. 둘 다 신약하고, 둘 다 땔감 없는 등불입니다.
그런데 한 사람은 열여덟 해를 갇혀 지내며 오백 권을 썼고 일흔다섯까지 살았습니다. 다른 한 사람은 임금의 자리에서 쫓겨나 서른하나에 죽었습니다.
대운의 순서도 갈렸습니다. 정약용은 없던 인성이 예순하나에 왔고, 연산군은 스물둘에 왔습니다. 정약용은 그 기운이 왔을 때 자기 묘지명을 썼고, 연산군은 그 스무 해 안에서 무너졌습니다.
같은 그릇에 같은 결핍인데 삶이 정반대로 갈렸습니다.
이게 저희가 사주를 운명이라고 부르지 않는 이유입니다. 사주는 타고난 그릇의 모양을 알려줄 뿐, 그 그릇으로 무엇을 담을지까지 정해주지는 않습니다. 비어 있는 자리가 같아도, 그 빈자리를 어떻게 대하느냐는 사람마다 다릅니다.
1506년 9월, 반정으로 폐위되어 강화 교동에 안치됩니다. 그리고 그해 11월 6일, 역질로 죽습니다.
부고를 논의한 기사에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신씨는 함께 폐위된 그의 아내입니다.
평생 지켜주는 것이 없던 사람이, 마지막에 찾은 것도 사람 하나였습니다.
그리고 그가 죽은 날은 음력 11월 6일이었습니다. 태어난 날이 11월 7일이니, 서른한 번째 생일을 하루 앞두고 세상을 떠난 셈입니다.
이 명식에서 반복되는 흐름을 한 줄로 줄이면 이렇게 됩니다.
땔감 없는 등불이었습니다. 이어받을 것이 없으니 제 몸을 태울 수밖에 없었고, 그 불이 자신을 태웠습니다.
정(丁), 곧 음(陰)의 화(火)입니다. 일주 전체로는 정미(丁未)일주에 해당합니다. 명리에서 정화는 하늘의 해가 아니라 스스로 타서 주변을 밝히는 등불에 비유됩니다.
음력 1476년(성종 7) 11월 7일 자시(子時)입니다. 성종실록이 '전날밤 3경 5점에 원자가 탄생하였다'고 시각까지 적어두었습니다. 3경 5점은 자정을 막 넘긴 무렵이라 자시에 해당하며, 실록도 이 기사를 11월 7일자에 실었습니다.
목(木)입니다. 네 기둥 여덟 글자에 목이 하나도 없고, 나머지 넷은 전부 둘씩입니다. 정화 일간에게 목은 인성(印星)에 해당합니다.
일간과 비어 있는 오행이 같습니다. 둘 다 정화(丁火) 일간이고 둘 다 목(木)이 0입니다. 다만 나머지 글자와 대운의 순서는 다릅니다. 무엇보다 두 사람의 삶이 정반대였다는 점이, 사주가 운명을 정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폐위된 임금이기 때문입니다. 조선에서 쫓겨난 왕의 재위 기록은 「실록」이 아니라 「일기」로 불렀습니다. 광해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그 기록을 편찬한 쪽은 그를 몰아낸 사람들이었습니다.
연산군의 사주는 땔감 없는 등불(정화)에, 다른 것은 고르게 갖췄으나 지켜주는 자리만 정확히 비어 있는 구조입니다.
일곱 살에 어머니를 잃었고, 열여덟에 임금이 되었고, 평생 없던 기운이 돌아온 스무 해 안에서 무너졌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찾은 것은 사람 하나였습니다.
같은 그릇을 가진 사람이 전혀 다르게 살았다는 것. 연산군의 사주가 알려주는 것은 그쪽에 가깝습니다.
연산군의 정화(丁火) 기운과 비어 있던 인성의 자리가 내 사주에도 있을까요? 생년월일만 넣으면 나와 가장 닮은 인물과 오행 일치율을 바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 글의 역사적 사실은 국사편찬위원회가 공개한 《조선왕조실록》 원문을 직접 확인해 인용했고, 성종실록과 중종실록 중 어느 쪽인지를 밝히고 권수와 날짜를 적었습니다. 폭정에 관한 서술은 「연산군일기」에 근거하는데, 그것을 편찬한 쪽이 그를 몰아낸 사람들이라 이 글에서는 다루지 않았습니다.
사주 해석과 대운 풀이는 사료가 아니라 명리학에 근거한 저희의 해석입니다. 특히 인성을 어머니의 자리로 읽은 대목은 해석일 뿐, 명리에서 인성이 곧 어머니를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과 다른 내용이 있다면 알려주세요. 확인 후 바로잡고, 정정 사실과 날짜를 이 자리에 남기겠습니다.
참고 자료: 《성종실록》 성종 7년 11월 7일·성종 13년 8월 16일, 《중종실록》 중종 1년 11월 8일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sillok.history.go.kr) ·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