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수대비는 배운 적 없는 것을 가르쳤다 — 《내훈》을 쓴 사람의 빈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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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켜줄 것도 쥘 것도 없이 오백 권을 남긴 사람 |
정약용(1762~1836)의 명식을 열면 지금까지와 다른 게 보입니다.
지금까지 저희가 다룬 인물들은 비어 있는 자리가 하나씩이었습니다. 정약용은 둘입니다.
사주에서 나를 낳고 지켜주는 것을 인성(印星)이라 하고, 내가 쥐고 다스리는 것을 재성(財星)이라 합니다. 뒷배와 재물이라고 바꿔 말해도 됩니다. 정약용의 여덟 글자에는 그 둘이 다 없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조선에서 가장 많이 썼습니다.
년주 임오 | 월주 정미 | 일주 정미 | 시주 미상 |
| 木목 | 없음 | |
| 火화 | 3 | |
| 土토 | 2 | |
| 金금 | 없음 | |
| 水수 | 1 |
| 항목 | 내용 |
|---|---|
| 이름 | 정약용 (丁若鏞) — 자는 미용(美庸), 호는 사암(俟菴) |
| 생년월일 | 음력 1762년 6월 16일 (영조 38년), 마현리 |
| 몰년 | 1836년 (75세) |
| 사주(삼주) | 임오(壬午)년 · 정미(丁未)월 · 정미(丁未)일 |
| 일간 | 정(丁) — 음(陰)의 화(火), 등불 |
| 십성 구성 | 비겁2 · 식상2 · 재성 0 · 관성1 · 인성 0 |
| 오행 분포 | 목 0 · 화3 · 토2 · 금 0 · 수1 |
| 부족한 오행 | 목(木)과 금(金) — 둘 |
| 신강·신약 | 신약(身弱) |
| 생시 | 미상 (삼주 기준) |
| 출처 | 「자찬묘지명」 광중본 (다산시문집 제16권) |
이 글의 근거는 조금 특별합니다. 정약용은 예순한 살 되던 1822년, 자기 묘지명을 스스로 썼습니다. 태어난 날부터 유배 십팔 년까지 자기 손으로 적어 남겼죠. 이 글은 그 「자찬묘지명」 원문을 한국고전종합DB에서 직접 열어 읽고 썼습니다. 다만 짚어둘 게 있습니다. 자기가 쓴 글은 기록이면서 동시에 자기 이야기입니다. 억울함이 실릴 수도 있고, 덜어낸 부분이 있을 수도 있죠. 그 점까지 포함해서 읽는 편이 정확합니다.
명리에서 병화(丙火)가 하늘의 해라면, 정화(丁火)는 등불입니다. 촛불, 화롯불, 방 안의 심지 같은 것이죠.
해는 그냥 떠 있기만 해도 밝습니다. 등불은 다릅니다. 제 몸이 타 들어가야 주변이 밝아집니다. 그리고 밝힐 수 있는 범위가 좁아서, 아주 가까운 곳만 비춥니다.
정약용의 명식에는 이 불이 셋입니다. 여덟 글자 중 셋이 불이니 상당히 뜨거운 사주죠. 그런데 그 불을 이어받아 키워줄 나무(木)가 하나도 없습니다. 불은 나무를 태워 커지는데, 땔감이 없는 겁니다.
명리에서 정화 일간에게 목은 인성입니다. 나를 낳아주고 지켜주는 자리요. 부모의 자리, 뒷배의 자리, 물려받는 자리.
당신의 일간은 스스로 타는 쪽인가요, 그냥 빛나는 쪽인가요? 같은 불이라도 해와 등불은 사는 방식이 다릅니다.
인성이 없다는 것이 실제로 어떻게 나타나는지, 정약용만큼 선명한 경우도 드뭅니다.
그는 스물여덟에 급제해 규장각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정조의 총애가 남달랐습니다. 자기 묘지명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서적과 궁중의 말과 짐승 가죽 같은 하사품이 이루 다 적을 수 없을 정도였고, 기밀에 참여해 글로 아뢰면 즉석에서 들어주었으며, 밤마다 진귀한 음식을 내려 배불리 먹였고, 궁중 깊이 보관된 책도 청하면 보게 해주었다고요. 그러고는 한마디로 정리했습니다. "모두 특이한 예우이다."
여기까지만 보면 뒷배가 든든해 보입니다. 그런데 그 뒷배가 제도가 아니라 사람 한 명이었습니다.
같은 달에 임금이 책을 내려주었고, 같은 달에 임금이 죽었습니다.
정약용은 자기 인생의 분기점을 바로 그달로 못 박았습니다. 천주교 때문이라거나 당쟁 때문이라고 적지 않았습니다. "이달에 승하하시니 이에 화가 일어났다." 그 한 문장입니다.
인성이 없다는 건 이런 뜻입니다. 지켜주는 것이 사람 하나뿐일 때, 그 사람이 사라지면 아무것도 남지 않습니다.
정조가 어떤 사주였는지는 따로 정리해 두었습니다. 흥미롭게도 정조의 명식에도 인성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지켜주는 것 없이 자란 임금이, 지켜주는 것 없는 신하의 유일한 방패였던 셈입니다.
정조가 죽고 이듬해, 1801년 봄에 정약용은 옥에 갇힙니다. 두 형도 함께였습니다. 그가 적은 문장은 짧습니다.
여덟 글자입니다. 형이 죽은 일을 이렇게 적었습니다.
그리고 유배가 시작됩니다. 장기현으로 갔다가, 그해 가을 황사영 사건으로 다시 끌려와 조사받고, 관련이 없다는 결론이 났는데도 이번엔 강진으로 보내집니다.
그 강진에서 십팔 년입니다.
당신에게도 무언가가 무너진 해가 있었나요? 사주는 그 해가 왜 하필 그때였는지를 보여주기도 합니다.
사주가 타고난 그릇이라면 대운은 10년마다 바뀌는 계절입니다. 정약용은 한 살부터 10년 단위로 흘렀습니다.
무신 1세~ | 재성 | |
기유 11세~ | 재성 1776년(15세) 혼인 | |
경술 21세~ | 식상 1783년(22세) 생원 · 1789년(28세) 갑과 제2인 급제 | |
신해 31세~ | 관성 1795년(34세) 승지·병조참의 · 1797년 곡산부사 | |
임자 41세~ | 관성 1800년(39세) 정조 승하 · 1801년(40세) 하옥과 유배 | |
계축 51세~ | 식상 유배지 저술 · 1818년(57세) 해배 | |
갑인 61세~ | 인성 1822년(61세) 회갑, 자찬묘지명 | |
을묘 71세~ | 인성 |
세 대목이 눈에 들어옵니다.
서른하나부터 쉰까지 스무 해가 관성(官星) 대운입니다. 관성은 직책과 명예이면서 동시에 나를 누르는 것입니다. 승지가 되고 참의가 된 것도 이 스무 해 안이고, 옥에 갇히고 유배를 간 것도 이 스무 해 안입니다. 그를 세운 기운과 그를 무너뜨린 기운이 같았습니다.
쉰하나부터 예순까지는 식상(食傷) 대운입니다. 식상은 내 안의 것을 밖으로 꺼내는 기운이죠. 그가 유배지에서 쏟아낸 것이 정확히 이 시기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하나. 평생 없던 목(인성)이 예순한 살에 처음 들어옵니다.
십팔 년 동안 그가 쓴 것을 본인이 직접 세어 적었습니다.
| 분야 | 권수 |
|---|---|
| 경전 연구 (시·서·예·악·역·춘추와 사서) | 230권 |
| 시문 | 70권 |
| 나라의 제도 · 목민 · 재판 · 국방 · 지리 · 의약 등 | 약 200권 |
흔히 말하는 '오백 권'이 이 합입니다. 남이 세어준 숫자가 아니라 본인이 자기 묘지명에 적은 숫자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이것이 없어지지 않으면, 혹 채용할 사람이 있을 것이다."
쥘 것이 없는 사람(재성 0)이 꺼내는 기운의 대운(식상)을 만나면 이렇게 됩니다. 손에 남길 재산이 없으니 글로 남긴 겁니다.
자찬묘지명을 읽다 보면 이상한 대목이 있습니다.
1801년, 대신들이 모두 무죄로 풀어주자는 의견을 올렸는데 오직 한 사람이 반대해서 유배가 결정됩니다. 서용보(徐龍輔)입니다.
1803년 겨울, 대비가 석방을 명합니다. 그런데 재상이 된 서용보가 저지합니다.
1819년 겨울, 조정에서 그를 다시 쓰자는 논의가 나옵니다. 서용보가 또 저지합니다.
짧은 묘지명 하나에 같은 이름이 세 번 나옵니다.
정약용이 자기 무덤에 넣을 글에 그 이름을 세 번 적었다는 뜻입니다. 잊지 않았던 겁니다.
다만 여기서 저희가 판정할 수는 없습니다. 서용보가 왜 그랬는지는 이 글에 적혀 있지 않고, 정약용이 남긴 기록만으로 한 사람의 속내를 단정하는 건 무리입니다. 다만 정약용이 그렇게 적었다는 사실만은 분명합니다.
명리로 보면 이 대목도 결이 맞습니다. 관성은 나를 누르는 기운인데, 그의 관성 대운 스무 해에 그것이 사람의 얼굴을 하고 나타났습니다.
저희가 앞서 다룬 두 사람은 그러지 못했습니다.
| 정조 | 없던 불이 예순셋에 들어오는데 마흔여덟에 떠났습니다 |
|---|---|
| 신사임당 | 없던 자기 편이 쉰셋에 오는데 마흔여덟에 떠났습니다 |
| 정약용 | 없던 인성이 예순하나에 오는데 — 일흔다섯까지 살았습니다 |
그는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대운이 시작된 예순한 살에 한 일이 바로 이겁니다. 자기 묘지명을 스스로 쓴 것.
인성은 나를 세워주고 정리해주는 기운입니다. 평생 그것이 없던 사람이, 마침내 그 기운이 도착하자 자기 손으로 자기 일생을 정리했습니다. 없는 것을 끝내 스스로 만든 셈입니다.
세종대왕도 물려받을 명분이 없어 집현전을 세웠습니다. 그 사주도 인성이 0이었죠. 없으면 만든다 — 같은 방식입니다.
그가 회갑에 적은 문장은 이렇습니다.
이 명식에서 반복되는 흐름을 한 줄로 줄이면 이렇게 됩니다.
땔감 없는 등불이었습니다. 제 몸을 태우는 수밖에 없었고, 그렇게 태운 것이 오백 권으로 남았습니다.
정(丁), 곧 음(陰)의 화(火)입니다. 일주 전체로는 정미(丁未)일주에 해당합니다. 명리에서 정화는 하늘의 해가 아니라 스스로 타서 주변을 밝히는 등불에 비유됩니다.
음력 1762년 6월 16일, 영조 38년입니다. 「자찬묘지명」에 본인이 직접 적어두었습니다. 태어난 곳은 한강 가의 마현리(지금의 남양주)입니다. 왕이 아닌 인물의 생일이 1차 사료로 확인되는 드문 경우입니다.
목(木)과 금(金), 두 가지입니다. 정화 일간에게 목은 인성(나를 지켜주는 것), 금은 재성(내가 쥐는 것)입니다. 세종대왕과 신사임당도 각각 한 자리가 비어 있었지만, 두 자리가 동시에 빈 것은 정약용이 처음입니다.
1801년 서교(천주교) 문제로 옥에 갇혔다가 장기현으로, 그해 가을 황사영 사건으로 다시 조사받은 뒤 강진으로 보내졌습니다. 다만 본인은 자기 묘지명에서 그 시작을 정조의 승하로 적었습니다. "이달에 정종대왕이 승하하니 이에 화가 일어났다"는 문장입니다.
본인이 「자찬묘지명」에 세어 적은 숫자가 경전 230권 · 시문 70권 · 잡저 약 200권입니다. 흔히 말하는 '오백 권'이 이 합이며, 유배 십팔 년 동안의 것입니다.
정약용의 사주는 땔감 없는 등불(정화)에, 지켜줄 것도 쥘 것도 없이(인성 0·재성 0), 누르는 기운만 얹힌 구조입니다.
그의 방패는 제도가 아니라 사람 하나였고, 그 사람이 죽자 곧바로 화가 왔습니다. 열여덟 해를 갇혀 지내며 오백 권을 썼고, 평생 없던 기운이 도착한 예순한 살에 자기 묘지명을 스스로 지었습니다.
없는 것을 끝내 스스로 만든 명식. 정약용의 사주는 그렇게 요약할 수 있습니다.
정약용의 정화(丁火) 기운과, 꺼내어 남기는 식상의 힘이 내 사주에도 흐르고 있을까요? 생년월일만 넣으면 나와 가장 닮은 인물과 오행 일치율을 바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 글은 정약용이 예순한 살에 스스로 지은 「자찬묘지명」 광중본(다산시문집 제16권)에 근거합니다. 원문은 한국고전번역원 한국고전종합DB에서 직접 확인했으며, 본인이 쓴 글이라는 점을 본문에서 먼저 밝혔습니다. 몰년은 국사편찬위원회 기록을 따랐습니다.
사주 해석과 대운 풀이는 사료가 아니라 명리학에 근거한 저희의 해석입니다. 서용보에 대해서도 저희는 판정하지 않았습니다.
사실과 다른 내용이 있다면 알려주세요. 확인 후 바로잡고, 정정 사실과 날짜를 이 자리에 남기겠습니다.
참고 자료: 《다산시문집》 제16권 「자찬묘지명(自撰墓誌銘)」 광중본 (한국고전번역원 한국고전종합DB db.itkc.or.kr) ·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